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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종, 조선을 업그레이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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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 국 화 2013. 12. 3.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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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 역사스페셜

세종, 조선을 업그레이드하다

 

 

지난 2월(2006년 당시를 말함), 국립 고공박물관에서는 강의(세종실록학교)가 한창이었다. 수강생이 백여 명에 이르는 이 강의의 주제는 다름 아닌 “세종”이다. 두 달 동안 매주 한 번씩 이곳에 나와 세종에 대해 배우고 있는 사람들. 이들은 왜, 세종에게 관심을 갖는 것일까.

 

한정수 / 경기도 용인시 죽전동

"지금까지는 피상적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시고 이런 쪽으로만 알 수 있었던 것을 다른 면에서 봤을 때 정치가적인 면에서 봤을 때는 지금 현실에서도 많이 활용해야 될 부분이 많지 않는가."

강영성 / 서울 서초구 반포동

"과연 어떤 리더십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그게 당면과제이기도 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다시 한 번 우리가 공부해봐야 될 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1418년 왕위에 올라 32년간 조선을 다스린 세종, 6백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결같이 존경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역사 속에서 세종이 이룬 시대는,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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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에 여론조사가 벌어졌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세종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학문이 깊고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왕이었다고 알려져 있는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많은 업적을 남겼죠. 훈민정음을 만들고, 각종 제도를 정비했으며,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등 얼핏 떠오르는 것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지만 세종이 왕위에 오르던 당시의 조선은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왕조를 세운지 28년 밖에 안 된 때라 국가의 제도는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사회는 혼란했으며, 나라와 백성들의 살림살이도 아주 힘들었죠. 그야말로 무엇을 먼저 손대야할지 모를 정도로 어려운 시기에, 세종은 22살의 많지 않은 나이로 왕위에 올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건국 조기의 이런 혼란 속에 조선의 임금이 된 세종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운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대로 손꼽히는 세종시대는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게 된 걸까요? 오늘은 HD 역사스페셜에선 세종의 진정한 면모를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세종 12년인 1430년 3월 5일, 조선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건이 벌어진다. 새로운 세금제도에 대해 백성들의 의견을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하라는 어명이 내려진 것이다.

 

"정부 육조는 물론 각 관사, 서울 안의 전현직 관리, 각도의 감사, 수령 및 관리로부터 여염의 빈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당시 조선은, ‘손실답험제’라는 조세법을 따르고 있었다. 손실답험제는 관리가 직접 농지를 방문해 농사가 잘됐는지 못됐는지를 판단한 뒤 이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같은 제도는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관리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세금이 정해지다보니, 이 과정에서 부정과 불공정 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강제훈 박사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향리들이 작황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내가 낼 세금이 달라지는 거니까 그게... 똑같이 농사를 지었는데 저 사람은 향리와 친분이 있고 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불만이 있을 수 있겠죠. 땅 하나하나 단위마다 조사를 하는 거니까 작황 결과를 세금을 내는 쪽에서도 동의하지 않을 수 있죠.”

 

 

 

 

세종은 보다 객관적인 방식의 세금제도를 만들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428년 공법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 것이다. 공법은 농사의 풍흉에 상관없이 일정한 세금을 매기는 정액 세법으로, 세종이 제안한 것은 토지면적 1결당 10두를 걷는 방식이었다.

 

강제훈 박사

“답험을 하지 않고 딱 정해진 액수를 걷는 거니까 걷는 쪽에서 그 정도 걷으면 되겠다라고 동의할 수 있는 부분, 그리고 내는 쪽에서도 그 정도면 낼 수 있겠다라고 동의할 수 있는... 그 선만 찾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 그런 조세제도가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조세제도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될 과제가 있었다. 당시까지도 형편없는 수준에 불과했던 농업 생산량을 끌어올려야만, 무리 없이 세금을 걷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세종 12년 <농사직설>이 편찬된다. 발달된 농법을 보급해 생산량을 증가시킴으로써, 민생과 조세 안정을 꾀하려는 목적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인 <농사직설>. 우리 풍토와 작물에 따른 농사법을 모아놓은 이 책은,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문중양 교수 / 서울대 국사학과

“그전에 중국으로부터 의존했던 농서는 전부 화북농법. 밭농사 위주의 농서였고요. 그렇기 때문에 논농사 중심의 훨씬 진전된 농업기술을 위해서는 그 실정에 맞는 농업기술을 정리한 농서가 필요했고 그런 것을 해주는 것이 바로 농서직설과 같은 농서의 편찬이었던 거죠.”

 

 

 

 

이 같은 노력의 결과, 세종 대의 농업생산성은 크게 높아졌다. 고려 말엔 70만결에 불과했던 농지면적이 170만결 까지 늘어났고 토지 1결당 300두였던 수확량은 최고 1200두로, 무려 네 배나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는 한편으로, 세금제도 개혁을 위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됐다. 바로 백성들의 의견을 묻는 대규모 여론조사였다.

 

"세금제도가 바뀌면 사는 게 좀 나아지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어요? 아전들이 마음대로 세금을 걷진 못할 거 아니에요?"

"근데 흉년이 들면 어떻게 되는 건가? 그때도 세금은 똑같이 내야 되는 거 아녀? 에이, 난 반대야."

 

 

 

 

 

세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백성들의 의견을 직접 수렴하겠다는 파격적인 발상, 세종이 실시한 이 여론조사에는 무려 5달 동안 17만 명이 넘는 백성들이 참여했다. 1430년 3월에 시작한 여론조사가 마무리된 것은 8월. 집계 결과는 반대가 7만 4천여 명, 찬성이 9만 8천여 명으로 전체의 57%가 새 세법인 공법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조정내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반대 의견이 찬성보다 우세하게 나타났는데, 특히 고위관리일수록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태영 명예교수 / 경희대 사학과

“고위 관리는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하급관리에 비해 부강자입니다. 부강자들은 종래의 토지법에서는 많은 토지가 숨겨져 있어요.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면 그 숨겨진 토지가 노출되죠. 그러면 대단히 많은 부담을 져야합니다. 그런 자기 재산을 숨기고 조세를 덜 내려는 그런 계급적 이유가 컸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신들의 거센 단대 속에서도 세종은 조세 개혁을 포기하지 않았다. 보다 합리적인 제도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논의를 거듭했고, 마침내 1444년, 토지 품질과 풍흉의 정도를 다함께 고려하는 내용의 세법을 완성하기 이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세법은 1450년 전라도 지방에 처음 실시됐고 수차례의 단계를 거쳐 전국으로 확대했다. 토지 생산성이 가장 낮은 북부지방까지 시행되기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 40여년이 지나서였다.

 

 

 

강제훈 박사

“그런 문제가 계속 현안으로 부각이 되면서 거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검토하고 그렇게 해서 그래도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어떤 선을 찾아갔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굉장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나온 그 법은 경국대전에 작황을 9등급으로 나누고 토지의 등급을 6등급으로 나눈다 보통 그렇게 요약이 되거든요. 전분6등 연분 9등 그러는데 그 원칙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가 됩니다. 400년간 운영을 해도 크게 문제없는 그런 세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30년 걸리긴 했지만 많이 합의했기 때문에 몇 백 년 운영해도 큰 문제가 없는 그런 제도를 만들어낸 것이죠.”

 

 

 

이처럼 세종은, 조선의 법과 제도 대부분을 새롭게 정비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려 말의 혼란 속에 흐트러진 통치체계를 바로 세우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세종이 실시한 제도 가운데 하나가 육기법이다. 육기법은 본래 30개월인 지방 수령의 임기를 60개월로 연장한 것으로,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김영수 교수 /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한 30개월 내려가서 지방행정을 장악해서 좋은 행정을 펼치긴 어렵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있더라도. 그래서 정말 좋은 의도를 갖고 있는 수령이 지방에 내려가 백성들을 위해 좋은 행정을 펼치려면 60개월은 필요하다 이게 세종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관리들 입장에서는 60개월이면 긴 기간입니다. 자기 관직생활을 30년으로 생각한다면 3분의 1을 지방에서 관직생활을 해야 되는데 그걸 일반 관리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요.”

 

통치체계의 안정과 직결돼 있었던 육기법. 그러나 이 제도는 조정에서, 수차례의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세종 22년 1440년 3월 18일에 벌어진 사건이다.

 

▶ 고약해와 세종의 논쟁

 

"지방 수령들의 임기가 60개월로 늘어난 후로 나라의 재물을 훔치는 자가 많아졌습니다. 또 5년이나 밖에 있어 조정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신하들의 마음이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신의 뜻을 들어주시어 육기법을 피하소서.(형조참판 고약해(高若海))"

"지방 수령을 열두어 고을 째 지내는 사람도 있소. 경은 겨우 한 고을의 수령을 지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 다시 지방에 부임하는 것이 싫어 이러는 것이요?(세종)"

"참으로 실망하였습니다. 전하. 전하는 제 뜻을 몰라주시더니 이제는 신더러 그르다 하십니까? 이러시면 신이 어찌 조정에서 벼슬을 하겠습니까?(고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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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EO 세종의 파격적 인재경영 전략!!!

 

깜짝 놀라셨죠? 흔히 조선시대는 임금이 곧 하늘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이렇게 신하가 임금 앞에서 언성을 높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정도로 심한 언쟁을 벌였다니...... 믿기 어려운 일인데요. 하지만 엄연히 기록에 남아 있는 사실입니다. 이 논쟁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세종 시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제도가 모두 순조롭게 추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방 수령의 임기를 60개월로 연장하는 육기법은 앞서 보신 것처럼 많은 관리들의 반발을 샀고, 세금제도 개혁 역시 반대가 적지 않았죠. 하지만 세종은 이런 의견들을 무시하고 무작정 자신의 뜻을 밀어붙인 게 아니라,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이고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 가장 좋은 정책을 만들어냈고 또 이를 실천해 나갔던 것입니다. 세종은 정치가이기도 했지만, 조선이라는 국가를 경영하는 탁월한 CEO의 면모도 갖고 있었던 셈인데요. 그러면 현대인들은 경영자로서 세종의 능력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 삼성연구소 여론조사 결과 표

 

네, 세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세종을 정치지도자만이 아니라 국가경영자로서 분석하려는 시도도 이뤄지고 있는데요. 이것은 지난해 국내 한 경제연구소가 우리나라 CEO 5백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입니다. ‘세종의 장점 가운데 가장 닮고 싶은 장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한글 창제 등 지식 창조 경영”을 닮고 싶다는 대답이 41.7%로 가장 많았고요. “신분이 아닌 능력 위주의 인재 경영 전략”을 꼽은 응답자도 38.9%에 달했습니다. 이밖에 “쓰시마정벌 등 신(新)시장 개척”, 또 “아악 정리와 음악 장려 등 감성 경영”, “측우기, 해시계 등 과학기술 경영”등이 닮고 싶은 장점으로 꼽혔는데요. 이러한 많은 업적을 가능하게 해준 중요한 원인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2위를 차지한 인재 경영 전략입니다. 인재를 키우고 이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것이야말로 지도자의 중요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야말로 파격적이면서도 효과적이었다는 세종의 인재 경영 전략, 지금부터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 릉. 이곳에는 세종 시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과학기구들이 복원돼 있다. 별자리의 위치를 표시한 천체모형인 혼상을 비롯한 각종 천문기구, 그리고 수많은 종류의 해시계에 이르기까지... 세종 시대는 조선의 과학이 가장 눈부시게 발전한 시기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물시계의 일종인 자격루다. 세종 16년인 1434년,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 경복궁에 설치돼 있었다는 자격루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이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한 자격루의 모습이다. 맨 위에 있는 물그릇에 물을 부으면 이 물은 다음 그릇을 거쳐 물받이 통으로 흘러든다. 일정 시간이 지나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올라가면서 지렛대 장치를 건드리게 되고, 이로 인해 쇠구슬이 움직이면서 징과 북을 울리게 되면 자동으로 시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용삼 교수 /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당시에 과학기술에 있어서 자동화, 요즘 현대와 같은 디지털화하는 기술을 장영실을 통해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세계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밤 시간을 알려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그것을 자동으로 함으로써 모든 백성들에게 밤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표준시로써 알려줄 수 있었다는 것이 상당히 당시의 시간 관리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고...”

 

 

 

 

 

자격루를 만든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세종이 발탁한 인재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장영실은 원나라 사람인 아버지와 기생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관노로, 관직에 진출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장영실의 재주를 알아본 세종은 그에게 수많은 연구를 맡겼고, 정4품 호군의 벼슬까지 내린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 조치였다.

 

박현모 실장 / 전통연구실장[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장영실처럼 노비출신인 경우가 몇 가지 나옵니다. 평양관노 출신 김인도 그렇고... 그런 사람들을 정5품, 정4품까지 올리는 과정에서 논의하는 과정이 세종실록에 나와 있는데 핵심적인 얘기는 그 사람의 출신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할 수 있는 재주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맡겨야 된다, 이게 세종의 가장 중요한 입장이구요.”

 

 

 

 

 

 

 

그뿐만이 아니다. 세종 시대 18년 동안이나 정승을 지낸 황희는, 세종이 왕자였던 시절 세자로 책봉되는 것을 반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임금을 보좌하고 관리들을 통솔하는 황희의 능력을 높이 샀고, 서슴없이 기용했다. 청백리의 표상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지만, 사실 황희는 정승을 지내는 동안 여러 차례 비리를 저질렀다는 스캔들에 휘말렸다. 그러나 황희의 비리에 대한 상소가 잇따르는 상황에서도, 세종은 그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고 오랫동안 곁에 두면서 정사를 의논했다. 허물보다는 능력을 중시 여기는 임금 덕분에, 황희는 명정승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황희와 장영실 외에도, 세종 시대에 활약한 인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4군 6진을 개척한 최윤덕과 김종서를 비롯해 음악가 박연(아악정리와 악기제작), 그리고 집현전의 여러 학자들(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정인지...)까지... 세종이 발탁한 인물들은 모두 우리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신봉승 극작가 / 학국역사문학연구소

“적재적소에 사람을 넣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완벽하게 일을 하게하고 일단 맡긴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책임을 지게하고... 이런 경영입니다. 이것은 지금 현재 큰 기업이나 대한민국은 말할 것도 없고... 세종의 이런 경영전략을 갖고 간다고 해도 조금도 하자가 없습니다.”

 

 

 

 

 

세종의 인재 경영 전략은 단순히 재능 있는 사람을 기려서 등용하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세종이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인재를 키우는 일이었다. 세종이 만든 학문연구기관인 집현전, 이곳에는 당대의 젊은 인재가 모두 모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들의 명단이 기록돼 있는 <국조방목>. 집현전에 근무했던 96명의 학사 가운데, 거의 전원의 이름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과거 시험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사람도 정인지를 비롯해 16명에 이른다. 이외에도 신숙주와 성삼문 등 집현전에는 당대 최고의 두뇌가 대거 모여 있었다. 세종은 이들에게 다양한 연구 과제를 주고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했다.

 

박현모 실장

“어진 사람들을 유능한 사람들을 모은다, 이게 집현의 첫 번째 기능이고요. 두 번째는 국왕에 대한 정책자문입니다. 국왕이 어떤 정책을 시행하려고 할 때 이게 효과가 좋을 지 나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혹시 과거에 이런 정책을 시행한 사례가 있었는지 선례를 조사하고요. 이걸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걸 물어보는 정책 자문기능이죠. 그리고 세 번째는 인재를 기르는 것입니다.”

 

 

 

젊은 인재들이 당장 현실 정치에 참여하기보다는, 수준 높은 학문을 쌓기를 바랐던 세종. 이를 위해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이 타부서로 전출되는 것도 금지시켰다.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이었던 귤을 비롯해 귀한 음식을 집현전에 하사하는가 하면, 잔치를 베풀거나 상을 내리는 일도 흔했다. 집현전 학사들이 긍지를 갖고 연구에 정진할 수 있도록,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신봉승 극작가

“집현전 학사들이 잠들었을 때 가는 거죠. 내시 하나 데리고 번거롭지 않게. 집현전 학사들이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는데 밥은 먹고 하는지... 이런 걸 알기 위해 가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가보니까 신숙주가 웃통을 벗어놓고 자는 거예요. 겨울인데... 감기 들면 안되니까 세종이 입고 있던 털옷을 벗어서 신숙주한테 입혀주죠. 신숙주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보니 임금 옷을 입고 있어요. 그담부턴 어떻게 돼요. 세종이 신숙주를 부르면 그 은혜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지. 그게 바로 세종이 갖고 있는 참된 리더십이죠.”

 

 

 

집현전을 통한 인재 양성. 이를 위해 세종은 파격적인 제도를 마련하기도 했다. 바로 사가독서제다. 집현전 학사들이 몇 달 동안 출근을 하지 않고 독서와 연구에 전념하게 해준 사가독서제. 이를 통해 많은 젊은 인재들이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박현모 실장

“한마디로 연구란 것은 갑자기 일회용 자판기 쓰는 것처럼 그렇게 나오는 게 아니라 축적이 돼야 고급지식이 나오는 거거든요. 그래서 일정한 기간 동안 축적을 해서 그 고급지식을 활용하기 위해 인재를 기르고 사가독서 같은 전문가 교육과정을 필요로 했던 것 같아요.”

 

 

 

 

이러한 세종의 지원과 관심의 결과로, 집현전에서는 수많은 책들을 펴냈다. 향약집성방과 같은 의학서적을 비롯해 풍속, 군사, 정치, 유교 등 다양한 분야의 실용서적들로 약 50여종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세종 이후, 집현전 학사들은 정계로 대거 진출해 활약하기 시작한다. 집현전에서 쌓은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이들은 조선의 전성기를 이루는 주역이 됐다. 인재 양성을 위한 세종의 노력이, 이렇게 결실을 맺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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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태종은 왜 충녕을 후계자로 택했나?

 

잘 아시다시피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존재했던 사회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세종은, 출신보다 능력 우선으로 인재를 뽑고 뒷받침을 해줬습니다. 그리고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종 시대의 업적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니, 세종을 두고 뛰어난 경영자이자 지도자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그런데 사실 세종 그 자신은 본래, 능력 발휘의 기회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은 왕비인 원경왕후 민씨에게서, 네 아들과 네 딸을 얻었는데요. 이 가운데 맏아들이 양녕, 둘째가 효령, 그 아래 셋째 아들인 충녕이 바로 세종입니다. 장자를 후계자로 삼는 유교 국가의 전통에 따라, 태종은 즉위 초기에 이미 맏아들인 양녕대군을 세자로 정해놓은 상태였죠. 그런데 태종 18년, 갑자기 세자 양녕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충녕을 그 자리에 올린 것입니다. 현대의 정치나 기업에 있어서도 정해져 있는 후계 구도가 변하게 되면 그 파장이 대단한데요. 더구나 조선시대에는 말할 필요도 없었겠죠. 그런데도 태종이 세자 교체라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뛰어난 무인으로 아버지 태조를 도와 조선 건국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이런 태종이 왕위에 오른 것은 조선 역사가 시작된 지 겨우 십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무력을 앞세워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지만,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여전히 산재해 있었다. 때문에 태종은 이러한 세력들을 제거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일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김영수 교수

“고려 말에 국가 체제가 붕괴되면서 장군들이 개인적으로 다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국가의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죠. 태조 때까지도 그랬습니다. 정종 대 와서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다음 사병 해체가 시작됐습니다만 개인적으로 군대를 거느리는 그런 문제를 다 해결하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다른 말로 하면 실력자들 실제 권력을 갖고 있는... 언제라도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그 사람들을 어떻게 제거하느냐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위 가간 동안, 태종은 수많은 사람을 숙청했는데 주로 외척세력과 개국공신들이었다. 태종의 처남으로 태종이 왕권을 잡는데 큰 역할을 했던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도, 불충죄 명목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들은 맏아들 양녕대군과 관계가 있었다.

 

김영수 교수

“문제는 민무구 형제의 군권이 너무 강력하게 성장하고 있었고 제2차 왕자의 난에서의 공... 그리고 양녕대군이 민무구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친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민씨 형제들이 보니 세종이 너무 뛰어나니까 태종한테 세종을 죽이라고 얘기합니다. 왕자는 한명 밖에 필요 없다. 뭐가 더 필요하냐... 그러니까 태종이 두 가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하나는 민씨 형제들의 권력이 너무 강화됐다, 그리고 만약 내가 죽고 난 뒤 양녕이 왕위에 오르면 이 사람들의 권력이 어느 정도까지 강화될 것이냐, 세 번째는 과연 형제들이 무사히 보호될 수 있겠느냐... 이런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을 해서 결국 제거를 시키죠.”

 

 

 

 

 

이처럼 잔인한 숙청작업을 통해 왕권을 강화해 나간 태종. 그는 자신의 후계자가 이 같은 피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안정된 정치를 펴기를 바랐다. 그러나 당시 세자였던 양녕은, 태종의 이 같은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태종실록에는 세자가 학문에 힘쓰지 않는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양녕대군은 자유분방하고 호탕한 성품으로 무인 기질이 강한 인물이었다. 글을 읽기보다는 말타기와 사냥을 즐기는 양녕을, 태종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또한 여자를 좋아하고 술과 내기를 즐기는 양녕의 행실은, 자주 태종의 노여움을 샀다. 여러 번 꾸중을 해도 양녕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고, 태종의 실망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신봉승 작가

“왕조실록을 읽어보면 양녕이 세자를 이어가지 못할 정도의 잘못된 점이 실제로 기록에 많이 나와요. 그래서 아버지 태종이 봤을 때는 다음 시대는 양녕처럼 거친 성격을 가지면 안 되겠다. 차분하고 학문적이고 가라앉은 사람이 새로운 형태의 조선을 개척해줘야 한다, 이런 생각을 태종이 가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과연 양녕이 애써 만들어 놓은 왕조의 기반을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태종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녕에 대한 태종의 걱정,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고 나니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늘이 내린다는 것이 임금입니다. 양녕은 그런 임금이 되기로 약속된 세자로서 13년 동안이나 역할을 했고, 아버지 태종 대신 정사를 돌본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양녕에게 흠이 많았다고 해도, 그런 세자를 쉽게 버릴 수가 있는 걸까요? 태종이 양녕이 아닌 충녕대군을 선택해야만 했던 이유, 태종에게 직접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MC : 양녕이 임금이 됐을 때 정말 문제를 일으킬지는 알 수 없는 일 아닌가요? 폐위까지 시킨 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 안 드세요?

태종 :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오. 나는 선대 임금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세운 이 나라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택한 거요.

 

MC : 충녕대군이 그 최선이었단 말씀이시죠? 그렇게 판단하신 이유가 뭐죠?

태종 : 이 나라 조선은 창업기의 혼란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소. 나는 이 창업의 시대를 내 시대에서 끝내고 싶소. 이제 다음 시대는 모든 개혁을 마무리하고 나라를 안정시켜야하는 그런 시대... 다시 말해 수성의 시대인 것이오. 이 수성의 시대에는 누구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이 임금의 자리에 있어야 하오. 무력이 아닌 실력과 덕으로 신하들을 따르게 하고, 조선이라는 신생왕조를 명실상부한 국가로 만들 수 있는 사람, 충녕이 바로 그런 사람이오.

 

 

 

 

 

 

세종대왕 기념관에 있는 독서도. 충녕의 성품과 자질을 한눈에 보여주는 그림이다. 양녕대군과 달리 책읽기를 좋아하고 학문이 뛰어났던 충녕은, 아버지 태종에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던 날, 태종은 자신이 충녕을 태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충녕은 총명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정치에 대한 소견이 뛰어나 크게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박현모 실장

“충녕이라는 후계자는 정말 수성기에... 창업한 다음 안정기에 정권을 맡을 사람으로 최적이었습니다. 무력이 아니고 대화와 학문적 권위로 많은 신하들을 설득하는 그게 첫 번째...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었고요. 두 번째로는 정치에 대한 탁월한 아이디어, 태종말대로 정치의 요체를 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이것을 풀 수 있는 탁월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능력이 누구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수성기의 군주로서 충녕, 그러니까 세종이 가장 적합하다.”

 

 

 

 

 

 

또한 세종은 왕권 강화를 위한 태종의 의지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장인인 심온이 태종에게 숙청당하고 처가가 풍비박산나는 상황에서도, 세종은 묵묵히 태종의 뜻을 따랐다. 실록에 의하면 세종은 장인이 죽은 다음 날 태종이 베푼 연회에도 참석해 새벽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 같은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박현모 실장

“자기 가족에 관한 부분인데 그렇게까지.. 사실 좀 비겁해보이기도 하거든요. 가족을 지켜야지... 자식도 곤란해지고 왕비도 죽고 파탄되고 그러면 사실 뭘 보자고 무슨 영화를 보자고 그 속에서 그렇게 입을 닫고 있는가라고 하는 그런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해석을 하자면 왕실도 중요하지만 국가라는 또 다른 더 큰 공동체를 위해서는 때로는 자기 가족도 희생될 수 있다 그런 부분이 세종한테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왕권 강화를 통해 국가의 안정을 꾀했던 태종에게 있어, 세종은 자신의 뜻을 이해하는 정치적 동지이자 믿음직한 후계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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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재구성한 세종의 일과 - “잠시도 게으르지 않은 왕”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있어 태조가 집터를 닦았다면, 태종은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임금에게 주어진 일은, 지붕을 덮고 나머지 부분을 마무리해서 제대로 된 집을 완성하는 것이었죠. 바로 그러한 과제를 위해, 아버지 태종이 맏아들인 양녕대군을 밀어내고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세종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세종이 죽은 뒤, 사관이 실록에 적은 기록인데요. 세종을 가리켜 미상소해(未嘗少懈), 그러니까 “잠시도 게으르지 않는” 임금이었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역대 어느 임금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는 세종. 그의 하루를 실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해봤습니다.

 

"저는 지금 경복궁에 나와 있습니다. 지금 시간이 새벽 5시. 아직도 주변이 캄캄할 정도로 이른 시간인데요. 하지만 세종은 벌써 하루 일과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세종은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시는데요. 죽과 같은 간단한 음식이 주요 메뉴입니다. 5시 30분에는 근정전에서 조회를 주관하실 예정입니다. 닷새에 한 번씩 열리는 조회에는, 육품관 이상의 중앙관사 관리들이 참석하는데요. 이들에게 업무보고를 받는데만 두 시간이 넘게 걸립니다. 조회가 끝나면 왕실 어르신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문안 인사를 드려야 합니다. 문안이 끝나고 나면 보통 9시 정도가 됩니다. 이제부터 사정전에서 윤대가 있습니다. 세종 7년에 만든 윤대는, 실무 관료들이 직접 임금과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신명호 교수 / 부경대 사학과

“왕이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첫 번째 윤대라는 것인데요. 윤대라는 것은 정부의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중견실무자들을 만나는 장입니다. 그러니까 고위관료가 아닌 행정실무자들을 직접 만남으로써 실무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왕이 직접 듣는다는 이야기고요.”

 

오후 일과 역시 빈틈이 없습니다. 첫 번째 일정은, 경연입니다. 여러 관료와 사관, 집현전 학사들이 참여하는 경연은 원래 임금이 유교경전을 공부하기 위해 만든 교육제도인데요. 세종은 거의 매일 이러한 경연을 통해 학문을 쌓는 한편, 각종 정치 현안들을 협의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경연은 신하들이 정책에 대해 비판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임금의 독단을 막는 역할을 했는데요. 조정에서 벼슬을 하면서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관리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있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바로 상소인데요."

 

매일같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상소문은 그 양이 만만치 않는데요. 이를 검토해 적절한 지시를 내리는 것도 임금의 중요한 업무입니다. 상소문 검토가 끝나면 도승지에게 정책을 지시하거나 회의를 주관하는 등의 일과가 이어집니다. 새로 관직을 받은 관리들을 만나 업무를 의논하기도 합니다. 어느 새 밤 10시가 넘은 시각, 그러나 세종의 일과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정책에 대해 백성들의 의견을 구하는 “구언”은, 세종이 빠짐없이 챙기는 업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명호 교수

“구언할 때 올라오는 것은 아주 가차 없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국왕이 잘못한다, 나라가 잘못되고 있다 아주 가혹한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그렇지만 이런 온갖 비방 이야기와 와도 국왕이 이를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야 다음 구언 때도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역시 세종은 구언도 잘 활용했고 의견들을 허심탄회하게 잘 받아들인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밤이 깊었지만, 세종은 아직도 잠자리에 들지 않았습니다. 역대 어느 임금보다도 정열적으로 정사에 임했던 세종. 세종에게는 하루가 24시간으로도 모자랐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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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의 음악을 만들라!

 

 

 

 

세종의 하루 일과, 정말이지 숨이 가쁠 정도네요. 취침 시간은 하루 평균 5시간이지만 이보다 저 적은 날이 훨씬 많았다고 하고요. 오전만 해도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공부와 업무 처리로 쉴 틈이 없죠. 아침 조회며, 윤대, 회의 등의 업무 시간을 모두 합하면 무려 10시간. 공부시간은 5시간이나 됩니다. 웬만한 사람은 며칠 버티기도 힘들 것 같은데요. 물론 타고난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재위 32년간 세종이 그처럼 일에 매달린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조선 역사상 가장 눈부신 업적을 남긴 세종. 그러나 임금이 아닌 한 인간으로써 세종의 일생은 고통과 번민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세종을 괴롭힌 것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폐세자가 되고만 양녕대군의 문제였다.

 

* 왕비와 세종 대화

"전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안색이 어둡습니다."

"실은 오늘 형님에 대한 탄핵상소가 또 올라왔소. 지난번에 내 초대를 받아 궁에 왔던 것을 두고 비난하는 말들이 많구려."

"지난번에는 양녕대군에 대한 탄핵상소가 올라와 크게 노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게 말이오. 내 형제간에 우애를 생각해 이런 상소를 자제해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건만..."

 

적장자인 양녕을 밀어내고 왕이 됐다는 사실, 여기에 양녕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치는 것에 대한 부담까지 겹치면서 세종의 고민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김영수 교수

“세종이 생각할 때도 자기 형이 왕위에 오르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자질이 약한 사람이 아닌데 아버지가 자신을 선택한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또 세종이란 양반이 굉장히 마음이 약한, 연민의 강한 사람이고 거기에 대해 큰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왕위를 물려주면서 양녕한테 얘기할 때 네 동생이 왕위에 오르면 네가 죽는 일은 없을 거다 이렇게 얘기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도 굉장히 가슴에 새겨야했고 실제로 신하들은 재위기간 내내 양녕을 죽이라는 상소를 끝없이 올리기 때문에 이를 막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종에게 또 다른 마음의 짐이 된 것은 왕권을 위해 뿌려진 피였다. 아버지 태종은 자신에게 안정된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세종은 이 모든 비극을 지켜봐야 했다.

 

신봉승 작가

“그 양반이 세자 때 자기 아버지에 의해 외삼촌 네 사람이 사형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장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목격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불행해요. 그런데 개인적인 불행은 더 크죠. 세종이 32년 재위 중에 정종대왕 내외분, 그리고 서원왕후... 이런 어른들이 많이 돌아가세요. 그런데 상국기간이 12년이야. 그게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럽니까.”

 

 

 

 

 

 

세종을 괴롭힌 또 다른 불행은 자식들의 잇따른 죽음이었다. 아들 두 명이 어린 나이로 연달아 세상을 떠났고... 재위 6년째인 1424년에는 맏딸 정소공주를 잃었다. 착하고 총명해 각별한 정을 쏟았던 정소공주가 13살 나이로 숨을 거두자, 세종의 상심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당시 세종이 직접 지은 제문에는, 그 안타까운 심정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너의 고운 목소리와 아름다운 모습은 눈에 완연하거늘 곱고 맑은 너의 넋은 어디로 갔단 말이냐.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아무리 참고 참으려 해도 가슴 아픔을 참을 길이 없구나.(세종실록)"

 

신봉승 작가

“점점 식어가는 딸아이의 시신을 안고 세종대왕이 울어요. 바깥에서 염을 해야 되니까 시신을 달라고 해도 세종이 내주질 않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정소공주를 위해 쓴 제문이 왕조실록에 적혀 있어요. 참 눈물 나는 명문입니다. 이 양반의 인간성이란 이런 거죠.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의 휴머니스트죠.”

 

 

 

이러한 인간적 불행 속에 세종은 더욱 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이 같은 과로와 스트레스는 수많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 부종과 소갈증, 요통과 안질 등 각종 질환에 시달렸다는 세종. 실록에 남아 있는 질병기록만 해도 백여 건이 넘는다.

 

세종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돼 44살 무렵에는 도승지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한다.

 

"내가 등창을 오랫동안 앓았는데 간밤에는 마음대로 돌아눕지 못할 정도로 고통을 참을 수 없었소. 소갈증이 생긴 것이 10여년이 지났고 지난여름에는 임질 때문에 오랫동안 정사를 돌보지 못했소. 지난봄에 강무를 한 후에는 눈이 어두워져서 걸을 때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알지만 누구인지는 모르겠더이다. 겨우 한 가지 병이 나아가려 하면 또 한 가지 병이 생기고 이렇게 날로 쇠약해져가니 정사를 돌보는 것에 점점 자신이 없어집니다."

 

김정선 박사

“점점 건강이 안 좋아져서 바깥에서는 세종 임금의 관을 준비할 정도로 건강이 매우 안 좋아졌다고 합니다. 당시 명나라 사신을 따라온 하향이란 의관이 있었는데 그 하향이 세종 임금을 진찰한 기록이 실록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당시 세종은 근심과 과로가 매우 심해 병을 얻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 40대 중반에 안질을 얻었는데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세종이 모든 일에 부지런하고 밤과 낮에 책보기를 계속했기 때문에 드디어 이런 눈병을 얻게 되었다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세종은 일을 멈추지 않았다. 각종 서적의 편찬과 과학 기구의 발명을 지휘했고, 국토 개척과 확장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재위 15년 무렵에는 북방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4군과 6진을 설치해,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현재의 국경선을 확정한다. 또한 재위 25년째인 1443년에는 마침내 훈민정음 창제라는 대업을 완성해냈다.

 

 

 

 

 

 

 

무엇보다 세종이 역점을 둔 것은, 조선의 문화와 정신을 높이는 일이었다. 즉위 초부터 각종 의례에 사용되는 음악을 정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조선은 유교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은 나라였고, 세종은 유교질서를 바탕으로 한 문화정치를 펴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예와 함께 음악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것이, 세종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세종은 박연을 등용해 아악의 정리를 맡겼고, 음악 연주의 기본이 되는 편경과 편종을 제작하게 된다. 그 자신이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세종은, 직접 악보를 창안해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각종 국가 행사에 중국의 음악을 연주하던 관행을 벗어나, 우리 정서와 문화에 맞는 독자적인 음악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김철호 전 원장 / 국립국악원

“조선왕조 내에 아니면 오늘날 21세기 한국 음악의 정신, 이런 것들이 어쩌면 세종대왕 대에 들어 잡혔습니다. 그리고 그 커다란 영향을 조선왕조뿐 아니라 현대까지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세종의 음악정책은, 정치적인 이유도 갖고 있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왕조의 기반을 굳건하게 다지려는 목적이었다. 훈민정음으로 만든 최초의 작품인 용비어천가를 비롯해, 세종은 선대 임금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노래들을 다양하게 만들고 연주하게 했다. 이를 통해 왕조의 안정과 국민의 화합을 이루는 것, 세종이 만든 음악에는 그처럼 큰 뜻이 담겨 있었다.

 

“위대하신 여러 성군 나라 운을 여시니 찬란한 문화정치 대이어 창성하네. 원하오니 성미를 길이길이 찬송하며 이를 오직 노래 얹어 베풀어서 부릅니다.” - 보태평 中 ‘희문’

“아하 우리 조상께서 대대무공 크셨도다. 크옵신 덕 높고 넓어 어찌 가히 형용하리. 온갖 춤에 차서 있고 섬에 법도 있어 아름답고 화기로와 길이 대성 보이도다.” - 정대업 中 ‘영관’

 

송혜진 교수 /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조선왕조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감이나 이런 거를 확보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일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음악이라고 생각해서 시와 노래를 지어서 위아래가 모두 이것을 부르고 들으면 건국을 위해 힘쓴 선왕들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리워함으로써 더 이상 불필요한 갈등이 야기되지 않으리라 믿었고 그 일을 실천한 것이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조선의 4대 임금 세종, 그는 재위 32년간 단순히 자신의 시대만을 다스린 것이 아니었다. 세종을 통해 조선은 왕조의 기틀을 세웠고, 국가 전반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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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끝맺음

 

1418년 세종이 왕위에 오르던 때는, 신생왕조 조선의 운명이 걸려 있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선대 임금들이 무력을 앞세워 일으킨 조선왕조, 그 피와 혼란의 창업기를 수습하고 수성의 시대를 열어야하는 막중한 임무가 세종에게 맡겨진 것이죠.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그 역사적 소명을 세종은 훌륭하게 완수해냈습니다. 과중한 업무와 병고, 그리고 가정사로 고통 받으면서도 조선을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고, 독창적이고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진 당당한 문화독립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시대뿐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미래를 위한 시스템과 문화 토양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 그 자신이 바로 조선이었고 조선왕조 5백년 역사의 밑거름이었던 것입니다.

 

# 글의 내용과 이미지 저작권은 한국방송 HD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사용을 금합니다.

 

 

 참고자료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KBS 1 라디오.

http://www.kbs.co.kr/radio/1radio/history/aod/index.html

 

 

 

출처 : 책을 벗 삼아
글쓴이 : 문화재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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