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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울 엄마 젯 날(음9월3일)

나의이야기 등

by 들 국 화 2006. 10. 24.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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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엄마 제사 날이다.

기막히게 굼주리고 고생 하며 살다가신 우리엄마,

엄마는 신랑감 얼굴도 보지못하고 외할아버지의 강요때문에 시집을 왔다고 하셨다.

동네 사람들은 큰아버지의 첩,아니면 신랑이 절룸바리 아닐까 하는 의문 등,

외가집 재판을 맡은 호남형에 미남,외할아버지도 신랑감을 한번도 보지못해서

생긴 소문들...

 

시집가는 날 행여 신랑이 절룸바리면 시집을 안 가겠다고 화장도 안하고

문틈으로 내다보니 아주 잘 생긴 건장한 청년 이었다고..

그러나,살면서 호랑이 보다 더 무서운 신랑이었고.시집 오고 보니 형편없는

가난뱅이에 홀시어머니의 시집살이..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 몸서리 처~진 다고 말씀하시며,가끔 다투셨다.

나도 어린시절에 조금은 생각난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소문난 효자였고 할머니는 아들을 남다르게 사랑했고,

아버지가 외출 몇일후에 돌아오시면 할머니가 네방에 가서 자라고 할때까지

할머니 방에 주무셨고 가난한 형편에 대고모할머니까지 모시고 살면서 무서운

시집사리에 굶주림,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살다 돌아가셨다.60세에,

억울해서 어떻게 가셨을까?

 

내가 9살때 할머니 돌아가셨고 대고모할머니는 몆년 더 살다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앉아서 주무신지 3년만에,대고모할머니는 똥싸서 마루에,

방에 바르고 살다 돌아가셨다.

엄마는 인상한번 안 쓰고 시중을 드셨다고,우리 고모님과 동네 사람들은

말씀하셨다. 

 

고모님은 나만보면 성깔은 업마닮고 애비닮지 말라면서,돈은 애비가 바닥없는

신발 신고 다니며 번 돈이니 아껴쓰라고 하셨다.

대고모할머니는 나도 기억한다. 엄마를 얼마나 고생시켰는지..

낮에는 김매고 밤에는 길삼에 바느질,방아질 까지(보리,벼 모두 절구에 찧어야 먹음)

 

하루종일 밭에서 풀뽑고 밤에는 삼(대마)삼고 명(목화실)잦고(물례질) 모시삼고

명주실 뽑고(누에고치)명주짜고 베(삼베)짜고 무명도 짜고 모시(벼틀에)짜고.

모시와 베는(손톱으로)째서,삼아(무릅에)서, 매서, 베틀에 짜야. 옷을 해 입을 수 있고.

무명은 목화로 따서 씨빼고 솜으로타서 물례에 실을 뽑아서 풀먹여 매서 베틀에 짜고..

 

명주는 누에를 뽕으로 키워서 고치가 되면 고치에서 실을 뽑아서 매(풀먹임)서

베틀에 짜서 다듬질해서 옷을 만들어 입는다(삼베. 모시는 여름옷 무명.명주는 겨울옷)

우리 엄마는 이런일을 모두 손수 하셨다.

옛날에는 길삼해서 팔면 논도사고 밭도 산다고 하셨다.

 

나도 삼 삼고 모시째고 밭도매고 모도 심고 보리베기 벼베기 모두 해 보았다.

바지 저고리도 만들어봤고 방아도 찧어 보았다.조금씩 재미로..

가난한 집안에 며느리로 아침은 밥, 점심은 고구마 안임 시래기죽, 저녁은

삭수제비(껍질채간 밀가루)먹고..

어떤때는 나물로 배를 채우고 하루종일 일하면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고 하셨다.

 

우리엄마 친정 집은 양반에 살만한 집안이었고 우리 큰집도 부자 였지만 무슨..

외할머니가 오시면 큰집에서 곡식을 마차로 실어다 줘서 먹고 산다고 하셨단다. 

나물로 배를 채우거나 시래기 죽으로,그것도 멀그레 해서 물이나 마찬가지..

 

우리 엄마가 항상 하신말씀이 너를 낳았는데 개구리 같았다고..

손가락 발가락만 길고 얼굴과 몸둥이는 배배 꼬여서 사람노릇 못할줄 알았는데,

사람된것이 신기하다고..

엄마가 나를 뱃속에 넣고 너무 굶주려서 그 모양으로 태어났다고 눈시울을

적시며 말씀하셨다.

세상에 태어나 젖이 모자라 백일도 되기전 부터 밥을씹어 먹여도 그걸 먹었다고

고모님이 말씀하셨다.

 

우리엄마는 자기도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새끼는 울어대고 할머니는 애 울린다고

야단치고 참다못해 차라리 죽으라고 엎어 놓았더니 고개를 반짝들고 울더란다.  

난 지금도 배고프면 땀흘리며 벌벌떤다.

그렇게 살다 아버지가 농민도장에 가셔서 고구마 재배법을 배워 오셨다.

일제때 (농민 도장은 지금의 농어촌 교육정도)결성면에 최초로 고구마 재배한

사람,그이름도 거룩한 "박 동 화,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유명해지셨다.

공화당 시절에 면의원 출마,선거 운동한다고 동네가 떠들석하던 기억이난다.

 

바닥없는 신발신고 나무해서 팔던 그 어린아이가..

 

내가 기억나는것은 새벽이 되면 여러 동네에서 고구마 사러 아줌마 들이,

아줌마들은 고구마를 삶아서 동네로 이고다니면서 팔았다.

우리 아버지가 최초로 재배한 고구마큰놈은 내 머리통만큼 커서 몆 조각씩 내서

삶아야 했고,우리집은 이때 부터 큰부자는 아니지만 밥걱정은 하지 않았 다.

쌀.보리가 없으면 고구마로 배를 채울수 있었으니 말이다.

 

엄마는 길삼해서 팔고 아버지는 고구마 농사로..이때부터 우리집은 땅을 사들였다.

논을 살때 도와준 동네 형님이 있었다고 성함은 김욱진.아들은 김창한.

아버지는 틈만 나면 아저씨 이야기 하시며,그집에서 아버지보고 막내 아들이라고

하셨단다.

어려서부터 아주 싹싹하고 부지런해서 귀염 받았다고..

 

땅 살때 돈이 모자라면 참봉집 아들 욱진아저씨가 빌려주고 외상으로 논도 주고..

그 집안은 6. 25 때 식구가 죽고 어린 아이들만 살아서 몇년전 그 아이들을 찾았다.

아버지의 은혜를 값겠다고..

내 나이 또래만 살아서 지금은 그 사람들이 어렵게 산다고 아버지가 좀 도와준다고

찾았는데,많은 도움은 아니지만 보탬이 된다면 나도 즐거운 마음이다.

 

옛날에 그 부모님으로 부터 도움을 받았고 지금 그 후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생에 그 얼마나 보람있고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삶은 그렇게 흘러 가는가보다, 도움을 받고 주면서..우리 아버지 엄마는 그렇게

고생하며 사셨다.

엄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계시지만 나는 엄마 아버지가 부모님 한테 하신 그 효 를

우리 부모님께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엄마는 항상 사람이 앉았다 일어난 자리에 "흠" 을 남기면 안 된다고 말씀 하셨다.

과연 내가 그렇게 살았는지 나도 모르겠다.

엄마! 제가 잘살고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가 하신 말씀은 자주 되뇌며 살고 있답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엄마를 야단치고 때려야 좋아해서 아버지는 엄마를 때렸다고 하시며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를 즐겁게 해 드려야 하는데 그걸 찾다보니 엄마가 머리를

감아 빚어서 그걸 트집잡아 때렸다며 아버지는 후회하시고,엄마는 억울해서 두분은

두고두고 다투셨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머리는 왜 빗었냐고,말이 되남요?그렇게 살다 우리 엄마는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살아 계실때 우리는 고기 맛을 보지 못했다.

우리도 못 먹어본 고기를 엄마는?물론 엄마 아빠도 가난땜에 할머니 혼자 드시라고,

우리가 만약 고기를 집으러 가면 아버지는 우리를 때렸다.

 

큰엄마나 당숙어른이 오시면 닭을 잡아서 두분만 드시게 하셨다.

우리집은 손이귀해서 친척이라곤 큰엄마와 당숙이 제일 큰 어른이신데

우리는 밖으로 내 보내고 다잡수시면 뼈만남은 국물은 누가먹었는지 기억이없다.

둘째아버지 큰아버지 당숙모는 일찍 돌아가시고 큰엄마 당숙만 계셨다.

 

그래서 나와 내 밑에 동생 둘은 고기를 먹어 본 적이 없다.

할머니 돌아 가실때까지..그것뿐이 아니다.

앞집에 자식없는 할머니가 사셨는데 그 할머니를 앙우할머니라 불렀다.

아마도 고양이를 기른모양이다.

앙우할머니 집에가서 찬밥가지고 할머니 모시고 오너라,하면 그날은 하얀

머리칼 섞인 찬밥 먹는건 엄마나 나였다 그때는 그밥이 왜 그리 더러웠는지..

 

아침에 누가 연장이나 돈을 빌리러 오면 꼭 아침을 먹여 보내는데 두 사람은 밥을 굶는다.

장정 밥은 많이 담아야하고 해놓은 밥에 항상 모자라서 엄마와 나는 굶는다.

우리는 그렇게 굶는 날도 많았다.

그때는 오는 사람도 아버지도 왜그리 미웠는지..

지금은 아버지와 옛날 이야기 하면서 울기도 웃기도 하고 아버지를 놀리기도 한다.

 

앙우할머니 밥도 아버지가 가저오랬으면 아버지가 잡수시고 동네 사람도 밥을 주시려면

아버지밥 주시지 맨날 우리만 그 밥 먹고 굶었다고 그건 좋은일이 아니고 식구를 고생시킨

일이라고 아버지를 놀려대며 우리는 웃었다.

옛날 이야기지만 동네 사람들은 우리 할머니는 죽어서 구렁이 되였을 거라고 하셨다.

엄마에게 심한 시집살이 시켰다고,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께 잘 해서 복 받아서 자식이 잘 살거고 엄마는 복 받아 좋은 곳으로

가셨을거라고,할머니는 글쎄다..

 

부모님께 효는 엄마가 하신거고 동네 어른들께도 엄마가..아버지는 식구를 몹시

괴롭혔다고 생각한다.

두번불러 대답이 없으면  매로 다스리는 우리아버지,

지금 생각하면 못들은 대답을 어떻하라고..

이제는 호랑이였던 우리아버지와 옛날이야기 하면서 웃을 수도 있다.

엄마는 혹독한 할머니 아버지 시집살이에 기 한번 펴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고,

우리는 지금 이렇게 행복한 삶을 살면서 옛날 이야기 한다.

 

우리 아이들도 이 다음에 내가 고생한 삶에 뒤안길을 나누며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아주길 바란다.

우리엄마의 교훈을 되살리며,

내가 앉았던 자리에 "흠"을 남기지 말라,라는말씀을 우리 아이들도 기억하며..

 

어머니 오늘은 천천히 오셔서 편안한 마음으로 며느리가 정성껏 차려주는 음식

배불리 드시고 옆에 함께오실 친구가 있음 나누어 드세요.

어머니!우리 걱정은 하지 마시고 밉지만 아버지 건강을 도와주시구요.

꿈에라도 자주 뵙고싶은데 안될까요?

어머니!고생만하시다 가신 우리어머니, 만고의 불효여식 영자 가슴이 아려옴니다.

옛날 배곱을때 생각하시며 많이드시고 천천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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