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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20대 삶-

나의이야기 등

by 들 국 화 2007. 1. 1.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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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싫은 나의 20대  70년도,

 

어느날 우리는 행복을 꿈꾸며 세종 문화회관,별관에서 결혼식이 올려젔다.

신혼 여행은 온양 온천으로..

우리의 불행은 결혼날을 잡아놓고 살림집을 준비 할때 부터다.

그래도 젊음은 재산이라고 용기좋게 앞날에 희망을 꿈꾸며,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의기양양 하게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당시 큰집은 1급정비 사업에 세차장 까지 겸했고 신랑은 그곳에 있었으며 형에게

집 한채 값은 투자를 했고 형이 집 한채는 사준다며 신랑이 야무지다고,근데 결혼 후

월급을 가저오지 않았으며 신랑은 감기를..각혈까지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생신이 음 2월11일,우리는 친정 나들이를 했고 하루밤 을 자는데

울 아버지는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으니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아무리 병원을 가자고 해도 안 간다고 했드니,울 아버지가 사위를 되리고 적십자

병원엘 가셨다.나는 직장에 가느라 아버지와 사위 둘이서 병원엘...

 

사위때문에 어려운 서울에 오신거다.

다음날 결과까지 아버지와 함께 갔으며 결과는 결핵 3기,울 아버지는 울며 가셨다고 한다.

뒤에 들은 말이지만 사위 결핵 3기란 말을듯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서울역에서

한참을 울으시다 오셨다고..

 

딸 결혼한지 3개월도 채 안되었는데 3기 환자라니,사위가 병자라,

그것도 전염성이있는 결핵,울 아버지에 심정을 너무도 잘 알것같다.

혼인 신고를 해줘야 하냐고 내의견을 물으신 울 아버지 심정,

 

직장에서 돌아오니 아버지는 가셨고 혼자서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날 바라 봤다.

물어볼 이유가 있을까?

뻔한 결과를,이때 시골로 요양차 떠나는데 순희네 집에서 4부변을 얻었고

직장에 도움을요청 했지만 거절,어쩔수 없이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아 시골로

요양차 떠났다.

 

그렇게 매정한 형도 있더란 말이다.

월급도 없이 형집에서 군 제대하고 지금까지 11년을 살았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럴수가,큰아이 낳고서 월급을 받았으니 참말로 애터지는 세월이었다.

 

결혼전에 무슨 약을먹어서 뭐냐고 물으니 용각산 이랬고 감기가 잘 낳지않아서

용각산을 먹는다고..아 불싸,그때는 몰랐다.

자신도 병을 모르고 살아온 것이니 우리 불행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니 결혼하는 순간부터다.

 

울 아버지 말씀,전염될수 있으니 사위는 처가에 보내지 마라,

나도 자식을 키우니 어쩔수 없다 라고 하셨다.그때 울아버지 연세가 50대

세월은 유수와 같다더니 울아버지도 50대가 있었던가?

 

지금 나보다 훨 할버지였는디,70년 동생이 대학 시험15일 남겨놓고 서울에

왔으며 독서실에서 자고 라면만 먹었다고,12월24일 독서실 문을 열지않아

갈곳이 없어 전화 했다면서,아버지 부탁으로 못 왔다고..

 

우리는 그렇게 신혼생활이 시작되었고 밥그릇은 매일 삶아야하는 일상생활이..

아버지가 아들 한번 안아주지 못하며 볼에 입맞춤 한번 못하고 자식을 키우는 신세,

동생이 누나집에 못오고 사위가 처갓집에 못가는 신세,

그시절 우리를 이해할수 있는 사람은 이세상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때부터 주의해야 할 점,잘먹고,술먹지말고,부부한방에 자지말고,병원약에

하루한대씩 주사 맞아야하고,몸은 편안히 지내라나..

당시 신랑월급18,000원 내월급 20,000원 주사한번 맞는데 약방에서 200원,

주사약은 병원에서 가저오고 정기검사가 안과와 간검사,페,

 

이때 우리는 다디미방 2층에 스레트지붕 상 하수 없는집 보증금 8만원 월 4천원씩

월세를 살았고,물 한바가지 들어 올리면 한바가지 내다 버리는 그런 고약한 집에 살았다.

한달 월급으로 병원약 값도 모자랐고 식생활은 친정에서 가저다 했다.

 

결핵발견 전에 벌써 큰아이가,나는 아기낳기 1주일전에 직장을 그만두었다.

임신중독, 세브란스병원 의사 말로 산모가 죽지 않으면 아이가 죽는다고 빨랑 입원 하라고,

먹을것도 없는 주제에 입원은 무슨..나는 죽을수도 있다는 공포속에 아이를 낳게되었다.

 

발이부어서 신발은 고무신을 신었고,아침에 일어나면 손가락을 움직일수 없었다.

병원다녀온 그 다음날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이불을 쌓아놓고 거기에 발을 언저놓고

누워서 몆일을,부기는 살며시 없어지고 1주일후에 아이를 낳았는데 아주 건강한

사내아이가 우렁차게 울어 대고,나는 죽었나 했드니 말짱하게 살아 있었다.

 

의사 판단으로 나는 한번죽었다 살아난것이다.

그때 죽었으면 지금 나는 무엇이 되여 있을꼬..다시 사람으로,예쁜 여자로

않임 멋진 남자?이때부터 우리는 무서운 세월을 보내야 했으며 그래도 살아야 했다.

어느 뜸에 아이는 태어나고,겁도없이 또 아이를! 그 독한약을 먹으면서..

이건 지금생각이지 그때는 빨랑 아이낳고 직장다녀야 한다고 되게 급했시요.ㅎㅎ

 

젊은 나이에 방을 따로 쓴다면 월매나 싸웠을꼬,목침대 놓고 위에 또 아래 에서

큰아이 배에넣고 병원에 다니기 시작,둘째 아이낳아서 2년후 까지 병원엘

1주일,보름,한달에 한번,돈도없고 남편은 병들고 아이는 둘씩이나,큰아이손잡고

작은아이 업고,그렇게 병원엘..

 

5년 만에 아빠약 끊고 아이들 예방으로,이때 아이와 엄마에 비참한 전쟁은

말로 다 할수 없다.약을 안먹겠다 울며 도망가는 아이와 울면서 약을 들고

쫓아 다니는 엄마,병원과 전쟁에서 이겼다는 기쁨도 잠시.1년쯤 지나서 다시

아빠의 각혈은 시작되고,이병원 저병원,결핵에 의한 흉터 때문에 조금만

피곤해도 흉터가 터저서 생기는 현상 이라나..

 

건강한사람 피곤하면 코피터지는 것과같은 현상이라서 약도없고 조심하라고..

그런 세월이 50대 까지,눈물 흘일 여유도 옆에 눈 돌릴 마음에 여유도 없이 살아야 했다.

그래도 결혼을 후회 하거나 이혼을 생각해본 일은없었고 남편 보다 내가 우선이라고

생각해본일없이 집안 힘든일은 내가,좋은 음식은 남편,

아이를 가저도 나를위해 음식을 찾거나 편안을 꿈꾼일도 없다.

 

약이란 약은 별별거,개,뱀,지렁이,개구리,잉어,굼벵이,아기태,줄줄이 달아놓고

용약,한약,민간요법도 서리맞은 삐비속 삼씨에 구구자뿌리

그시절엔 개소주집이 없어서 집에서 시루에 내려 먹었고,주위 사람들이 종국아빠는

무슨약을 그렇게 많이 먹냐고 물으면 간이 나쁘다고 했다.

결핵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두려워 멀리할 것이고 아이들 친구도 또 방을 얻을수

없을 까봐서..

 

나는 원래 친구를 좋아 하지만 그때는 여건이 허락지 않아 친구들은 멀리하고

속이 답답하면 혼자서 훌쩍 어디든 돌아와야 살수있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때부터 혼자서 여행을 잘 다녔고 설악산도 대청봉까지 지리산도 천왕봉까지,

설악산은 한계령.백담사.오색.천불동 길을 훤히알아 지금도 이곳으로 혼자 갈수있다.

 

혼자하는 여행도 즐길만 한데 한 3~4년 정도 등산도 여행도 땐스 배운다고

잔차 배운다고 여행을 멀리하고 서울에서만 놀았다.

다시 시작해야 할텐데,올 봄에는 훌쩍 떠나야지,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남편을 마음놓고 안아보지 못하고..행여나 하는 두려움과 함께,항상 병을

비밀로 하고 주위를 두려워 하며 가장않인 가장노릇 하며 생활을 꾸려야 했다.

 

남들은 지금에 나를 부러워 한다.

가슴아프던 그 끔직한 옛날 사정은 모르니,삶이란 속고 속이며 산다던가

공평 하다던가?고생끝에 낙 이라던가?

약값걱정 식생활걱정 아이들 교육걱정 우리 신랑은 아무것도 모른다.

행여나 나보다 먼저 죽을까봐 전전긍긍 떠 받들기만 해서 어려움을 모른다.

 

아내에게 해야할 도리도,아이들에게 해야할 도리도,생활이 어떻게

돌아가는 사정도,그저 자기한몸 편안 하면 된다.만사 편한사람이 되어 버렸다.

술!! 술이라면 진저리 처진다. 술 끊고 한 일년정도 각혈 중지..술이 없었다면

3년정도에 끝낼 병을,병원에서 3년이면 된다고 했는데,인명은 재천 이라나..

 

약을 밥먹듯이 술을 냉수마시듯 먹고 살았으니 온전한 구석이 있을라구

오대삭신 육천 마디가..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 하신다.

말준이 내장은 소가죽으로 만들었나 라고,나는 우리 아이들이 나의 재산이며

스승 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아이들 자라는걸 보면서 용기 희망 행복 꿈,모든걸 아이들에게 찾으면서

살수 있었으니까

 

엄마의 사정을 잘알고 태어난것 처럼 하느님이 내려주신 천사처럼 그렇게

눈물한번 안주고 예쁘게 건강하고 착하게,삼시세끼 밥만 먹였는데 잘 자라주어서

우리 아이들은 엄마의 스승 이었다!! 그렇습니다 나의 스승,

 

아들아 사랑한다,그리고 고맙다,반듯하게 자라주어서..

나는 이렇게 한많은 젊음을 보내왔고 지금은 편안한 새삶을 살아간다.

음지가 있음 양지가 있다던가..

이것이 삶 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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